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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시간의 공존

언젠가 만나게 될 그를 소망하며





스프링 옆으로 종이를 뜯기 좋게 점선이 나있는 스케치북을 또 샀다. 이로써 이 스케치북/낙서장/메모장/아이디어 노트는 일곱권 째 쓰게 된다. 일반 문구점에서 살 수 없고 꼭 화방에 가야만 있는 캔슨의 에스키스북은 가지고 다니기에 좋은 사이즈인데다 종이질감이 꽤 톡톡해서 앞장에 잉크펜으로 적어도 뒷장에 잘 비치지 않아서 좋아한다.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해놓고 책 읽으면서 좋은 구절 메모도 해두고 큐티도 하고 디자인 스케치 까지 구분 없이 사용하기 좋아서. 갱지에 테이프 바른 것 같은 내츄럴한 노트 두 권은 0-check 의 것으로 여름에 한국에서 사가지고 왔다. 이곳의 디자인은 문구류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내가 가능하다면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고르고 골라 인디언 핑크색의 커버 노트와 엷은 코코아색 커버 노트 두 권을 골랐다. 인디언 핑크 커버 노트는 처음에는 공부하는 용도로 벌써 많이 썼다. 처음에는 뭔가 간지러운 용도로 사용하려고 일부러 하나는 핑크색을 고르고 다른 한 권은 조금 더 큰 사이즈의 회색 커버를 골랐는데 어쩌다보니 두 권의 용도가 바뀌었다. 
 
여기서 말하는 간지러운 용도란, 어느날 큐티를 하는 도중에 떠오른 생각을 노트에 적어보면 어떨까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냥 거기까지는 매일 묵상한 것들을 간단히 적어두는 큐티노트의 용도니까 별로 그렇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단순히 큐티노트 그 이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중에 내 미래의 배우자에게 쓰는 편지 형식' 으로 쓰면 어떨까, 해서.. 근데 막상 쓰려고 보니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뭔가 아직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쓴다는 사실이 일단 엄청나게 쑥스럽기도 하고, 러브장 따위를 쓰는 열여섯 사춘기 소녀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이다. (실제로 나의 오랜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오글거려서 미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 좀 해보겠다는데 옆에서 칭찬 좀 해주지.. 아으 -_-;)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하게 솔로에 대한 예찬론을 가지고 있었다. 뭐, 교만했다고도 볼 수 있고, 그만큼 몰라서 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소위 잘 나가고 돈도 잘 벌고 혼자 있어도 빛나는 완벽한 커리어 우먼의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커서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져서 그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나의 모습은, 아예 내 인생에서 없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불과 스무살까지만 해도 결혼이라는 문제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고, 언젠가 때가 되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되는거겠지, 곁에 누군가가 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거나 트라우마적 과거가 있었다거나 하면 이해가 될 법도 한데 복에 겨운 나는 이제껏 너무 편안하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더 없이 좋은 엄마 아빠 상을 늘 보면서 자라왔음에도 가정에 대한 바른 기대나 비전이 없었다. 남자친구들을 두 번 만나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교제를 하면서도 진지하게 '나와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까,' 와 같은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을 가볍게 만난 것은 절대 아니였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만났지만 목적 - 결혼을 위한 - 있는 데이트 대신 그저 데이트를 위한 데이트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언제였던가, 교회 수련회 때 이런 가정과 배우자 상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야말로 기절초풍이었다. 독신은 하나님이 절대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부터 이미 쇼크였으니까. 결혼은 필수사항이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도 충격이었다. 사랑으로 이룰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가 가정인데,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거란 기대와 비전도 없이 감히 사람을 만나는 짓은 당장 그만두라는 것도 무서웠고, 나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거나 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에게 있어 일단 그런 목적을 전제로 사람을 만난다는게 꼭 전장에서 갑옷 벗고 방패 내리고 총칼 들고 쫒아오는 적군에게 스스로 뛰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라. 스스로가 '가드리스' 가 된다는게 무척이나 두려워서. 사람은 여러 사람 만나봐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외국인이 되지 못한 보수의 극치인 나는 새로운 사람, 특히 남자, 를 만나보는 것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그러했다.
 
어쨌든 그 충격의 수련회 이후로 좋았던 싫었던, 그제서야 유심히 보게 되었다. 키, 외모, 학벌.. 겉으로 보이는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일단 관찰했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인지, 리더십은 있는지, 인격과 가치관이 올바르게 성립이 된 사람인지.. 마음도 취향도 나와 잘 맞고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허락 없이 요모조모 뜯어보게 되었다. 이런건 잘 맞는데 이건 좀 아니구나, 아.. 내가 이런걸 못 견뎌하는구나. 이런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부딪혀보니 의외로 괜찮네.. 같은.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이미지도 찾을 수 있고, 동시에 내 자신과 성격, 마음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솔로로 꽤 오랫동안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오래 알고 지냈고 정말 친했던 친구와 진짜 '진지한' 만남을 가졌다. 이런 사람이면 배우자로 좋을 것 같았다. 그 전 남자친구가 한없이 밝아서 나 역시도 많이 밝아진 상태였지만 일종의 까칠함은 버려지질 않았었는데 이런 내 성격의 지랄맞음도 (;;;) 다 받아주고 내가 섭섭하다 싶을 정도로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때로는 나를 다그치기도 하고 덮어주기도 했다. 한없이 착하고 따뜻하고 한결 같고 이 친구랑 만나는 2년여간 한 번도 투덜거리는걸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성실한 면도 좋았고 말도 못하게 깨고 웃기는 면도 좋았다. 2% 부족해, 애 같애, 라고 하면 욱하는데 그게 귀여워서 일부러 깐족대고 놀린 적도 있다.. 뭐, 그 땐 미안했다. 하하..
 
그런데 기대가 커서였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내 제대로 된 배우자를 목적으로 했던 첫번째 만남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친구였던 상황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도 예전과는 달리 편해지는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마음을 많이 쏟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한없이 원망스럽고 속상하고 슬프면서도 그래도 잘 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를 생각했을 정도로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타이밍도 좋지 않았고 각자 가야할 길과 바라는 방향이 많이 달랐다는게 이유였고, 물론 이 이별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역시 생각해보면 '서로가 아니기에' 헤어진게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상황을 겪으며 한동안은 차라리 결혼 따위 안하고 말지, 사람 만나는거 진짜 힘들다. 내 사람 만나려고 하니 더 힘드네.. 이러다가 누군가 나 좋다고 하고 썩 나쁘지 않으면 죄다 만나보지 뭐.. 하는 삐딱한 심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진지했던 만남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음에 상처가 남아 문득 울컥하고 올라올 때가 있어서.. 그리고 또 이대로 오랫동안 방황. 지난 봄 부터 지난 주 까지 거의 꼬리에 꼬리를 문 결혼식 행렬에 참석하면서도 별로 생각이 달라지질 않았다. 그냥 또 한 커플 결혼하는구나, 축하해, 근데 굳이 사람들 많은데 내가 식에 가서 한 자리 낀다고 뭐 그리 달라질까, 싶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결혼한 내 친구를 봤다. 결혼 준비에서부터 해서 무엇인가 도와줄 수 있는게 없을까 늘 고민하게 됐던 참 많이 아끼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 받고,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다 보니 그렇게 메마르고 닫혔던 마음에 다시 소망이 생기더라. 그리고 늘 고맙게도, 내가 예전 사람이 기억나서 기운 없어 하면 좋은 에너지를 주려고 애쓰고, 괜찮다고, 꼭 좋은 사람 만날거니까 너무 그렇게 쳐져있지 말라고, 그럴 때 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을지 더 생각하고, 소망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내가 잘 되길 바라는 진심이 전해지도록.. 그 때 마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가 참 고마웠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큐티 및 미래의 나의 남자에게 편지 쓰기. 비록 낯부끄럽다는 생각도 여전하고, 내가 하고 있는 짓을 아는 친구들은 오글거린다고 당장 그만둬! 라고 했고 ㅎㅎ 뭐 나이 먹을대로 다 먹고서 유치하게 이런걸 하고 있어, 싶기도 하지만 한 순간의 생각으로만 끝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꼭 맞는 배우자를 준비해두셨다는데, 그냥 그것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거란 기대감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까지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스스로의 내면을 다지고 성숙해지자는 의미로다가. 좋은 생각, 느낀 점, 감사한 점, 내가 배우자에게 바라는 것들과 내가 할 수 있고 해주고 싶은 것들을 차근차근히 적고 있다. 훗날 노트를 빼곡하게 적어 미래에 만나게 될 나의 그 분에게 선물했을 때, 나의 이런 마음과 공들인 시간들, 적혀진 고민거리와 기도제목들을 마음으로 깊이 공감해주고 고마워하고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스턴트로 바뀌어 가고 있고, 당장 사랑한다고 말해야하고, 그렇다면 어떤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과 분위기에 휩쓸려 그에 걸맞는 행동 - 예를 들면 여자에게 고가의 핸드백이나 구두를 사준다거나 반지, 장미 꽃다발을 건네거나 하는 일 - 들을 해야한다고, 믿게 만들어 가고 있지만 내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 나에게 소중한 것을 나누었을 때, 그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고 감사히 여길줄 아는, 진실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마음과 생각을 잘 지키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언젠가 만나게 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거라 믿는다. 
 
곧.. 만나지겠지요?
 
God bless, for my 'honey-to-be' :-)